육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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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 침을 묻히는 건 어머니의 오래된 버릇
막 달인 간장 맛이라도 보듯
눌러 찍은 손가락을 혀에 갖다 대고
한참을 머물렀다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곤 하지
세상엔 체액을 활자에 묻히지 않곤
넘어갈 수 없는 페이지가 있다네
혀의 동의 없이는 도무지 읽었다고
할 수 없는 페이지가 있다네
연필심에 침을 묻혀 글을 쓰던 버릇도 버릇이지만
책 앞에 침이 고이는 건
종이 귀신을 아들로 둔 어머니의 씁쓸한 버릇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같다고
아내도 읽지 않는 내 시집 귀퉁이에
어머니 침이 묻어 있네
어린 날 오도독 씹은 생선뼈와 함께
내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던 그 침
페이지 페이지 얼룩이 되어 있네


                                         <육친>  - 손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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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엔 혀의 동의 없인
읽었다고 할 수 없는
살았다고 할 수 없는
삶의 순간, 페이지가 있다.

멈칫, 흠칫, 주저하게 되는 그런 순간들
찰나의 순간
후회와 안도와
아련함과 지릿함이 교차하는
그런 순간들

내가 마치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순간과
내가 마치 세계 홀로가 되버린 것 같았던 순간
내가 마치 이 순간만을 위해 산 것 같은 순간과
내가 마치 이 순간은 인생에서 잃지 않을것만 같았던 순간.

혀의 동의
혀의 허락을 받아야지만
넘어갈 수 있는 페이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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