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을위한공작소/필사적인필사'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0.08.01 유성매직 그리고 청테이프 -이기호
  2. 2010.08.01 100퍼센트 여자아이를 만나는 일에 관하여
  3. 2010.07.31 우리는 결국 모두 형제들이다
  4. 2010.07.31 육친
  5. 2010.07.30 수문 양반 왕자지
  6. 2010.07.29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7. 2010.07.29 주말연속극 -고영민

유성매직 그리고 청테이프 -이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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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어느 모임 뒤풀이 자리에서 학생들과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나온 대화의 대부분은 오직 하나, 스마트폰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평소 얼리 어답터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시대에 뒤처지지는 않는다고 자부하면서 살아왔었는데, 이런, 이젠 정말 구닥다리 세대가 되어버렸구나. 속으론 그렇게 찔끔, 했으면서도 겉으론 계속 어디선가 주워들은 `4G 스마트폰' 운운하면서 아는 체를 하려고 노력했다. 노력하면서도 한편, 그들의 놀랄 만한 정보 접근력과 속도에 감탄했고, 그것이 못내 부럽기도 했다. 이것이 우리 세대와는 다른 그들만의 활력이고, 그들만의 세대의식이자 특권이겠구나,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렇게 인정하기도 했었다.


그런 인정이 다시 뒤바뀐 건, 지난 달 서울 어느 사립대 재학생인 김예슬 학생이 대자보를 통해 밝힌 `나는 오늘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라는 공개 자퇴서를 읽게 된 이후부터였다. 내가 유심히 본 건 그녀의 자퇴서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그녀의 글씨, 그 자체였다. 그녀는 왜 많고 많은 형식 중에서도 굳이 `대자보'란 구세대의 대화창을 사용했을까?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이나, 트위터, 싸이의 다이어리도 아닌, 손도 많이 가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대자보를 이용했을까? 그것이 나는 궁금했고, 며칠 동안 계속 그 의문을 머릿속에 품고 돌아다녔다.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그 이유를 내멋대로,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었다. 만약 그녀가 자신의 `공개 자퇴서'를 학교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올렸다고 치자. 그러면 그 다음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었을까? 아마도 대자보보단 더 많은 사람이, 실시간으로 그녀의 글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 뒤에 일어날 일들은 사실 뻔하다. 그녀를 옹호하는 댓글들과 그녀를 비난하는 댓글들, 양비론의 댓글들과, 농담의 댓글들이 속속 그 아래에 달렸을 것이다. 그러다가 댓글과 댓글끼리 서로 싸우는 일도 일어났을 것이며, 홈페이지 관리자는 이 글을 삭제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을 본 김예슬 학생 또한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진행되는 논란들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입장을 수정하고 싶은 생각들이 슬몃슬몃 들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건 비단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의 문제만은 아니고, 트위터나 싸이에서도 똑같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니 어쩌면 그래서, 그녀는 `대자보'를 이용했다. 그것은 돌아갈 길을 만들지 않겠다는 의미도 있지만, 말이 아닌 어떤 행동의 의미가 더 컸다. 쉽게 수정되거나 삭제될 수 없는 행동.


지금도 인터넷에 들어가보면 수많은 이십대 청춘들이 저마다의 정치적 견해를 견지하고,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기사들과 정치적 사안들에 대해서 각자의 의견들을 보란듯이 제시하고 있다. 그 의견들만 보면 과연 누가 그들을 정치적으로 무관한, 자신의 스펙 쌓기에만 열중한 세대라고 말할 수 있을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한데, 문제는 딱 거기까지만이다. 치열하게 담론은 오고 가지만, 언제나 담론은 담론 수준에서만 머물고 만다. 누군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면, 행동으로, 정당한 투쟁으로 실천하는 것이 아닌, 단순한 비아냥거림으로, 또 다른 담론으로만 맞설 뿐이다. 그것은 권력을 가진 자들에겐 참으로 고마운 현상이 아닐 수 없는데, 그저 귀만 닫고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기만 하면, 모든 것을 다 자신들의 뜻대로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대자보를 작성한 김예슬 학생은 자신의 글 말미에 `행동한 대로 살아내겠다는 용기를 내련다'라고 썼다. 그녀는 그 문장을 유성매직으로 썼다. 그리고 그것을 청테이프에 의지해 게시판에 붙였다. 정보와 속도는 지식을 쌓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지성까지는 담보하진 못한다. 어쩌면 우리 시대의 인터넷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스스로 지성을 포기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더 많은 자유를 주는 것 같지만, 더 무서운 포기가 거기 숨어 있는 것이다


And

100퍼센트 여자아이를 만나는 일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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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어느 해맑은 아침, 하라주쿠의 뒤안길에서 나는 
100퍼센트의 여자아이와 엇갈린다.
솔직히 말해 그다지 예쁜 여자아이는 아니다. 
눈에 띄는 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멋진 옷을 입고 있는 것도 아니다. 
머리카락 뒤쪽에는 나쁜 잠버릇이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고, 
나이도 적지 않다. 벌써 서른 살에 가까울 테니까.

엄밀히 말하면 여자아이라고 할 수도 없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100미터 떨어진 곳에서부터 
그녀를 알아볼 정도다.
그녀는 내게 있어서 100퍼센트의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모습을 목격하는 순간부터 내 가슴은 땅울림처럼 떨리고,
입안은 사막처럼 바싹 말라 버린다.
어쩌면 당신에게도 좋아하는 여자아이 타입이라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령, 발목이 가느다란 여자아이가 좋다든지, 역시 눈이 큰 
여자아이라든지, 손가락이 절대적으로 예쁜 여자아이라든지,
잘은 모르겠지만 천천히 식사하는 여자아이에게 끌린다든지와 같은 식의.

나에게도 물론 그런 기호는 있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다가, 옆 테이블에 앉은 여자아이의 
코 모양에 반해 넋을 잃기도 한다.
그러나 100퍼센트의 여자아이를 유형화하는 일은 아무도 할 수가 없다.
그녀의 코가 어떻게 생겼었나 하는 따위는 전혀 떠올릴 수가 없다.
아니, 코가 있었는지 어땠는지조차 제대로 기억할 수 없다.
내가 지금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그다지 미인이 아니었다는 사실뿐이다.
왠지 조금 이상하기도 하다.

[어제 100퍼센트의 여자아이와 길에서 엇갈렸단 말이야]

하고 나는 누군가에게 말한다.

[음. 미인이었어?]

라고 그가 묻는다.

[아니야. 그렇진 않아.]

[그럼 , 좋아하는 타입이었겠군.]

[글쎄. 생각나지 않아. 눈이 어떻게 생겼는지. 가슴이 큰지 작은지,

전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겠다구.]

[이상한 일이군.]

[이상한 일이야.]

[그래서. 무슨 짓을 했나? 말을 건다든가. 뒤를 밟는다든가 말야.]

[하긴 뭘 해, 그저 엇갈렸을 뿐이야.]

그녀는 동에서 서로, 나는 서에서 동으로 걷고 있었다.
제법 기분이 좋은 4월의 아침이다. 
비록 30분이라도 좋으니 그녀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녀의 신상 이야기를 듣고도 싶고, 나의 신상 이야기를 털어놓고도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981년 4월 어느 해맑은 아침에,
우리가 하라주쿠의 뒤안길에서 엇갈리기에 이른 운명의 
경위같은 것을 밝혀 보고 싶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평화로운 시대의 낡은 기계처럼, 
따스한 비밀이 가득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난 후 어딘가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우디 알렌의 영화라도 보며, 호텔 바에 들러 칵테일이나 뭔가를 마신다.
잘만 하면, 그 뒤에 그녀와 자게 될지도 모른다.
가능성이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나와 그녀 사이의 거리는 벌써 15미터 가량으로 좁혀졌다.
자, 도대체 어떤 식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면 좋을까?

[안녕하세요. 단 30분만, 저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습니까?]

이건 너무나 바보스럽다. 마치 보험권유 같지 않은가.

[미안합니다. 이 근처에 혹시 24시간 영업 세탁소가 없는지요?]

이 역시 같은 정도로 바보스럽다. 
무엇보다도 내 손에 세탁물 주머니조차 없지 않은가.
누가 그런 대사를 신용하겠는가?
어쩌면 솔직하게 말을 꺼내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안녕하세요. 당신은 나에게 100퍼센트의 여자아이란 말입니다.]

아니, 틀렸어. 그녀는 아마도 이런 대사를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설령 믿어준다 해도, 그녀는 나와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당신에게 있어 내가 100퍼센트의 여자라 하더라도, 나에게 있어 당신은 
100퍼센트의 남자는 아닌걸요, 죄송하지만]

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만약 사태가 그렇게 되면 나는 틀림없이 혼란에 빠질 것이다.
나는 그 쇼크에서 두 번 다시 회복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내 나이 벌써 서른두 살, 결국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런 것이 아닐까.
꽃가게 앞에서. 나는 그녀와 엇갈리게 된다.

따스하고 조그마한 공기 덩어리가 피부에 와닿는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 위에는 물이 뿌려져 있고, 언저리에서는 
장미꽃 향기가 풍기고 있다.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 수도 없다. 흰 스웨터를 입은 그녀는 
아직 우표를 붙이지 않은 흰 사각 봉투를 오른손에 들고 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 것이다.
그녀의 눈이 졸린 듯한 것으로 봐서, 어쩌면 하룻밤 동안 
그것을 썼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각 봉투 속에는 그녀에 관한 비밀이 
전부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몇 걸음인가 걷고 나서 뒤돌아보았을 때, 
그녀의 모습은 이미 혼잡한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고 없었다.



물론 지금은, 그때 그녀를 향해 어떻게 말을 걸었어야 했는가를 
확실히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떻든 간에 너무나도 긴 대사이므로 틀림없이 제대로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내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실용적이지 못하다.
아무튼 그 대사는 [옛날 옛적에]로 시작되어,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지 않습니까]로 끝난다.



옛날 옛적에,
어느 곳에 소년과 소녀가 있었다.
소년은 열여덟 살이었고, 소녀는 열여섯 살이었다.
그다지 잘생긴 소년도 아니었고, 그다지 예쁜 소녀도 아니었다.
어디에나 있는 외롭고 평범한 소년과 소녀였다.
하지만 그들은 틀림없이 이 세상 어딘가에 100퍼센트 자신과 똑같은 
소녀와 소년이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렇게, 그들은 `기적`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적은 확실히 일어났다.
어느 날 두 사람은 거리 모퉁이에서 탁 마주치게 된다.

[놀라워, 난 줄곧 너를 찾아다녔단 말야. 네가 믿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넌 내게 있어서 100퍼센트의 여자아이란 말이야]

하고 소년이 소녀에게 말한다.

[너야말로 내게 있어서 100퍼센트의 남자아이야.
모든 것이 모두 내가 상상했던 그대로야. 꼭 꿈만 같아.]

두 사람은 공원 벤치에 앉아서, 서로의 손을 잡고 언제까지나 
실컷 얘기를 나눈다. 두 사람은 이미 고독하지 않다. 
그들은 각기 100퍼센트의 상대자를 원하며, 자신은 그 상대자의 
100퍼센트가 되고 있다. 100퍼센트의 상대자를 원하며, 상대자의 
100퍼센트가 된다는 것은 그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것은 이미 우주적인 기적인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마음속을 얼마 안되는, 극히 얼마 안되는 
의구심이 파고든다.
이처럼 간단하게 꿈이 실현되어 버려도 괜찮은 것일까 하는.
대화가 문득 끊어졌을 때, 소년이 말한다.

[이봐, 다시 한 번만 시도해 보자. 가령 우리 두 사람이 
진정한 100퍼센트의 연인이라고 하면, 반드시 언제 어디선가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리고 이 다음에 다시 만났을 때도 역시 
서로가 서로의 100퍼센트라면, 그때 바로 결혼하자구. 알겠니?]

[응, 알았어.]

그리고 두 사람은 헤어졌다. 서쪽과 동쪽으로.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시도해 볼 필요는 조금도 없었다.
그런 것은 해서는 안될 일이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정 100퍼센트 완벽한 연인이었으니까.
그것은 기적적인 사건이었으니까.
하지만 두 사람은 너무나 어려서, 그런 것은 이해할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정석처럼 비정한 운명의 파도가 두 사람을 마구 농락하기에 이른다.
어느 해 겨울, 두 사람은 그해에 유행한 악성 인플루엔자에 걸려,
몇 주일간이나 사경을 헤맨 끝에, 옛날 기억들을 몽땅 잃고 말았던 것이다.
어찌된 일일까, 그들이 깨어났을 때 그들의 머리 속은 마치 
D. H.로렌스의 소년시절 저금통처럼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참을성 있는 소년과 소녀였기 때문에,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다시금 새로운 지식과 감정을 터득하여, 훌륭히 사회에 
복귀할 수 있었다.

아아 하느님,
그들은 진정 확고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정확하게 지하철을 갈아타거나 우체국에서 속달을 부치거나 
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리고 완벽하지는 못해도 75퍼센트의 
연애랑, 85퍼센트의 연애를 경험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소년은 서른 두 살이 되었고, 소녀는 서른 살이 되었다.
시간은 놀라운 속도로 지나갔다.
그리고 4월의 어느 해맑은 아침, 소년은 모닝 커피를 마시기 위해 
하라주쿠의 뒤안길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하고, 소녀는 
속달용 우표를 사기 위해 똑같은 길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한다.

두 사람은 길 한복판에서 엇갈린다.
잃어버린 기억의 희미한 빛이 두 사람의 마음을 한순간 비춘다.
그들의 가슴은 떨린다.
그리고 그들은 안다.

그녀는 내게 있어서 100퍼센트의 여자아이란 말이다.

그는 내게 있어서 100퍼센트의 남자아이야.

그러나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기억의 빛은 너무 연약하고,
그들의 언어는 이제 14년전 만큼 맑지 않다.
두 사람은 그냥 말없이 엇갈려, 혼잡한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고 만다.
영원히...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지 않습니까.



그렇다. 나는 그녀에게 그런 식으로 말을 꺼내 보았어야 했던 것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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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우리는 결국 모두 형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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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대추장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 왔다.
대추장은 우정과 선의의 말도 함께 보내 왔다.
그가 답례로 우리의 우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이는 그로서는 불친절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대들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해볼 것이다.
우리가 땅을 팔지 않으면 백인이 총대를 들고 와서 우리의 땅을 빼앗을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대들에게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땅의 모든 부분이 거룩하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 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는 신성한 것들이다.
나무 속에 흐르는 수액은 우리 홍인의 기억을 실어 나른다.
백인은 죽어서 별들 사이를 거닐 적에 그들이 태어난 곳을 망각해버리지만,
우리가 죽어서도 이 아름다운 땅을 결코 잊지 못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우리 홍인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땅의 한 부분이고 땅은 우리의 한 부분이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의 자매이다.
사슴, 말, 큰독수리, 이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바위산 꼭대기, 풀의 수액, 조랑말과 인간의 체온 모두가 한 가족이다.


워싱턴의 대추장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온 것은 곧 우리의 거의 모든 것을 달라는 것과 같다.
대추장은 우리만 따로 편히 살 수 있도록 한 장소를 마련해주겠다고 한다.
그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그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안은 잘 고려해보겠지만,
우리에게 있어 이 땅은 거룩한 것이기에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개울과 강을 흐르는 이 반짝이는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피다.
만약 우리가 이 땅을 팔 경우에는 이 땅이 거룩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달라.
거룩할 뿐만 아니라, 호수의 맑은 물 속에 비추인 신령스러운 모습들 하나하나가
우리네 삶의 일들과 기억들을 이야기해주고 있음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물결의 속삭임은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가 내는 목소리이다.
강은 우리의 형제이고 우리의 갈증을 풀어준다.
카누를 날라주고 자식들을 길러준다.
만약 우리가 땅을 팔게 되면 저 강들이 우리와 그대들의 형제임을 잊지 말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형제에게 하듯 강에게도 친절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아침 햇살 앞에서 산안개가 달아나듯이 홍인은 백인 앞에서 언제나 뒤로 물러났지만
우리 조상들의 유골은 신성한 것이고 그들의 무덤은 거룩한 땅이다.
그러니 이 언덕, 이 나무, 이 땅덩어리는 우리에게 신성한 것이다.
백인은 우리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백인에게는 땅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과 똑같다. 그는 한밤중에 와서는 필요한 것을 빼앗아 가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땅은 그에게 형제가 아니라 적이며, 그것을 다 정복했을 때 또 다른 곳으로 나아간다.
백인은 거리낌 없이 아버지의 무덤을 내팽개치는가 하면 아이들에게서 땅을 빼앗고도 개의치 않는다.
아버지의 무덤과 아이들의 타고난 권리는 잊혀지고 만다.
백인은 어머니인 대지와 형제인 저 하늘을 마치 양이나 목걸이처럼 사고 약탈하고 팔 수 있는 것으로 대한다.
백인의 식욕은 땅을 삼켜버리고 오직 사막만을 남겨 놓을 것이다.


모를 일이다. 우리의 방식은 그대들과 다르다.
그대들의 도시의 모습은 홍인의 눈에 고통을 준다. 백인의 도시에는 조용한 곳이 없다.
봄 잎새 날리는 소리나 벌레들의 날개 부딪히는 소리를 들을 곳이 없다.
홍인이 미개하고 무지하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도시의 소움은 귀를 모독하는 것만 같다.
쏙독새의 외로운 울음소리나 한밤중 못가에서 들리는 개구리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면
삶에는 무엇이 남겠는가?
나는 홍인이라서 이해할 수가 없다.
인디언은 연못 위를 쏜살같이 달려가는 부드러운 바람소리와 한낮의 비에 씻긴 바람이 머금은 소나무 내음을 사랑한다.
만물이 숨결을 나누고 있으므로 공기는 홍인에게 소중한 것이다.
짐승들, 나무들, 그리고 인간은 같은 숨결을 나누고 산다.
백인은 자기가 숨쉬는 공기를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여러 날 동안 죽어 가고 있는 사람처럼 그는 악취에 무감각하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대들에게 땅을 팔게 되더라도
우리에게 공기가 소중하고, 또한 공기는 그것이 지탱해주는 온갖 생명과 영기를 나누어 갖는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의 할아버지에게 첫 숨결을 베풀어준 바람은 그의 마지막 한숨도 받아준다.
바람은 또한 우리의 아이들에게 생명의 기운을 준다.
우리가 우리 땅을 팔게 되더라도 그것을 잘 간수해서 백인들도 들꽃들이 향기로워진 바람을
맛볼 수 있는 신성한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안을 고려해보겠다.
그러나 제의가 받아들일 경우 한가지 조건이 있다.
즉, 이 땅의 짐승들을 형제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미개인이나 달리 생각할 길이 없다.
나는 초원에서 썩어가고 있는 수많은 물소를 본 일이 있는데
모두 달리는 기차에서 백인들이 총으로 쏘고는 그대로 내버려둔 것들이었다.
연기를 뿜어내는 철마가 우리가 오직 생존을 위해서 죽이는 물소보다 어째서 더 중요한지를 모르는 것도
우리가 미개인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짐승들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모든 짐승이 사라져버린다면 인간은 영혼의 외로움으로 죽게 될 것이다.
짐승들에게 일어난 일은 인간들에게도 일어나기 마련이다.
만물은 서로 맺어져 있다.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그들이 딛고 선 땅이 우리 조상의 뼈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들이 땅을 존경할 수 있도록 그 땅이 우리 종족의 삶들로 충만해 있다고 말해주라.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을 그대들의 아이들에게도 가르치라.
땅은 우리의 어머니라고.
땅 위에 닥친 일은 그 땅의 아들들에게도 닥칠 것이니,
그들이 땅에다 침을 뱉으면 그것은 곧 자신에게 침을 뱉는 것과 같다.
땅이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땅에 속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만물은 마치 한 가족을 맺어 주는 피와도 같이 맺어져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은 생명의 그물을 짜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그물의 한 가닥에 불과하다.
그가 그 그물에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은 곧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종족을 위해 그대들이 마련해 준 곳으로 가라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보겠다.
우리는 떨어져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우리가 여생을 어디서 보낼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아이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패배의 굴욕을 당하는 모습을 보았다.
우리의 전사들은 수치심에 사로잡혔으며 패배한 이후로 헛되이 나날을 보내면서
단 음식과 독한 술로 그들의 육신을 더럽히고 있다.
우리가 어디서 우리의 나머지 날들을 보낼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 많은 날이 남지도 않았다.
몇 시간, 혹은 몇 번의 겨울이 더 지나가면 언젠가 이 땅에 살았거나 숲 속에서 조그맣게 무리를 지어 지금도 살고 있는
위대한 부족의 자식들 중에 그 누구도 살아남아서
한 때 그대들만큼이나 힘세고 희망에 넘쳤던 사람들의 무덤을 슬퍼해 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왜 우리 부족의 멸망을 슬퍼해야 하는가?
부족이란 인간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인간들은 바다의 파도처럼 왔다가 간다.
자기네 하느님과 친구처럼 함께 걷고 이야기하는 백인들조차도 이 공통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한 형제임을 알게 되리라.



백인들 또한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가지는
우리 모두의 하느님은 하나라는 것이다.
그대들은 땅을 소유하고 싶어하듯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하느님이며 그의 자비로움은 홍인에게나 배인에게나 똑같은 것이다.
이 땅은 하느님에게 소중한 것이므로 땅을 해치는 것은 그 창조주에 대한 모욕이다.
백인들도 마찬가지로 사라져 갈 것이다.
어쩌면 다른 종족보다 더 빨리 사라질지 모른다.
계속해서 그대들의 잠자리를 더럽힌다면 어느 날 밤 그대들은 쓰레기 더미 속에서 숨이 막혀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이 멸망할 때 그대들을 이 땅에 보내주고
어떤 특별한 목적으로 그대들에게 이 땅과 홍인을 지배할 권한을 허락해준 하느님에 의해 불태워져
환하게 빛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불가사의한 신비이다.
언제 물소들이 모두 살육되고 야생마가 길들여지고 은밀한 숲 구석구석이 수많은 인간들의 냄새로 가득 차고
무르익은 언덕이 말하는 쇠줄로 더렵혀질 것인지를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다.
덤불이 어디에 있는가? 사라지고 말았다.
독수리가 어디에 있는가? 사라지고 말았다.
날랜 조랑말과 사냥에 작별을 고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삶의 끝이자 죽음의 시작이다.


우리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보겠다.
우리가 거기에 동의한다면 그대들이 약속한 보호구역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거기에서 우리는 얼마 남지 않은 날들을 마치게 될 것이다.
마지막 홍인이 이 땅에서 사라지고 그가 다만 초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구름의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기억될 때라도, 이 기슭과 숲들은 여전히 내 백성의 영혼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새로 태어난 아이가 어머니의 심장 고동을 사랑하듯이 그들이 이 땅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땅을 팔더라도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 달라.
우리가 돌본 것처럼 이 땅을 돌보아 달라.
당신들이 이 땅을 차지하게 될 때 이 땅의 기억을 지금처럼 마음속에 간직해 달라.
온 힘을 다해서,
온 마음을 다해서 그대들의 아이들을 위해 이 땅을 지키고 사랑해 달라.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이.


한 가지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모두의 하느님은 하나라는 것을.
이 땅은 그에게 소중한 것이다.
백인들도 이 공통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한 형제임을 알게 되리라.




                                                       <우리는 결국 모두 형제들이다>  - 시애틀 추장의 연설










And

육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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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 침을 묻히는 건 어머니의 오래된 버릇
막 달인 간장 맛이라도 보듯
눌러 찍은 손가락을 혀에 갖다 대고
한참을 머물렀다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곤 하지
세상엔 체액을 활자에 묻히지 않곤
넘어갈 수 없는 페이지가 있다네
혀의 동의 없이는 도무지 읽었다고
할 수 없는 페이지가 있다네
연필심에 침을 묻혀 글을 쓰던 버릇도 버릇이지만
책 앞에 침이 고이는 건
종이 귀신을 아들로 둔 어머니의 씁쓸한 버릇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같다고
아내도 읽지 않는 내 시집 귀퉁이에
어머니 침이 묻어 있네
어린 날 오도독 씹은 생선뼈와 함께
내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던 그 침
페이지 페이지 얼룩이 되어 있네


                                         <육친>  - 손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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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엔 혀의 동의 없인
읽었다고 할 수 없는
살았다고 할 수 없는
삶의 순간, 페이지가 있다.

멈칫, 흠칫, 주저하게 되는 그런 순간들
찰나의 순간
후회와 안도와
아련함과 지릿함이 교차하는
그런 순간들

내가 마치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순간과
내가 마치 세계 홀로가 되버린 것 같았던 순간
내가 마치 이 순간만을 위해 산 것 같은 순간과
내가 마치 이 순간은 인생에서 잃지 않을것만 같았던 순간.

혀의 동의
혀의 허락을 받아야지만
넘어갈 수 있는 페이지들



And

수문 양반 왕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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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 넘어 한글 배운 수문댁
몇 날 지나자 도로 표지판쯤은 제법 읽었는데


자응 자응 했던 것을
장흥 장흥 읽게 되고
과냥 과냥 했던 것을
광양 광양 하게 되고
광주 광주 서울 서울
다 읽게 됐는데


새로 읽게 된 말이랑 이제껏 썼던 말이랑
통 달라서
말 따로 생각 따로 머릿속이 짜글짜글 했는데


자식 놈 전화 받을 때도
옴마 옴마 그래부렀냐? 하다가도
부렀다와 버렸다 사이에서
가새와 가위 사이에서
혀와 쎄가 엉켜서 말이 굳곤 하였는데


어느 날 변소 벽에 써진 말
수문 양반 왕자지
그 말 하나는 옳게 들어왔는데


그 낙서를 본 수문댁
입이 눈꼬리로 오르며
그람 그람 우리 수문 양반
왕자거튼 사람이었제
왕자거튼 사람이었제



                                 <수문 양반 왕자지>  - 이대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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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함께 하려면
이정도는 되어야하지 않을까

여전히
왕자님과 새색시



And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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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은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 진다. 예술은 장점만을 지닌 인간들에 의한 것이 아니다.
  풍경화를 그리는 성모마리아나 단지를 굽는 배트맨, 이상하지 않은가!
  결점 없는 존재는 예술을 할 필요가 없다.


- 예술을 창조하는 것과 감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술창조는 하고자 하는 것과 해낸 것 간의 피할 수 없는 간극을 그대로 보여줘
  심기를 불편케 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창작자를 제외한 감상자에겐 결과물, 예술 작품이 중요할 뿐.

- 예술작업을 해 나가는 사람들은 계속하는 법을 배운 자들,
  좀 더 정확히 말해 중지하지 않는 법을 배운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 자신의 작품이 실패할 것이라는 두려움은 예술작업 주기에서 반복되는,
  정상적이며 건강한 일반 현상이다. 이땐, 전체 주기를 마치고 다음의 새로운 구상을 시작하고
  전개해야할 지점으로 되돌아 왔음을 나타낸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날 때, 예술적 죽음이 찾아오는 것이다.

- 포기는 중단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중단은 늘 하는 것이지만, 포기는 그것으로서 마지막이다.
  포기한다는 것은 다시 시작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시작하고 또 시작해야 하는 것이 예술인 것을.

- 최고의 기술을 발휘하여 가장 좋아하는 재료와 아이디어를 실현해 나가는 예술은
  고귀한 소명이지만 비열하고도 혼란스러운 두려움이 뒤따른다.

- 예술창조는 불확실하며 예측할 수 없는 과정으로, 불확실성은 예술 창조의 욕구의 본질을 이루고
  불가피하며 절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동반자인 것이다.
  이러한 불확실성에 대한 인내가 성공의 필수조건이다.

- 예술창조에 관한 두려움은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자신에 대한 두려움>, <타인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까에 대한 두려움>.
  전자는 최상의 상태에서 작업하는 것을 막고,
  후자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작업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

- 예술가인 척 가식을 부릴 수는 있어도 예술을 창조하는 척을 할 수는 없다.

- 두 그룹의 학급, 양으로만 평가하는 집단, 질로만 평가하는 집단.
  가장 뛰어난 예술품들은 양으로 평가한 집단에서 나왔다.

- 훌륭한 작품을 완벽한 작품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 작품 창작으로부터 남들에게 보이기까지의 일정한 격리기간,
  즉, 순수한 시간적 공백을 두는 것이 때때로 필요하다.
  창작자 자신이 자신의 작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그렇게 되면 남들의 평가의 순간이 와도 그들의 반응이 어떻든 그다지 큰 위협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 만일 어느 때 어떤 한 작품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바로 그 순간이 창작해야 할 작품이다. 다른 것을 하려고 하다가는 그 순간을 놓쳐버리고 만다.
  정말이지 우리 자신의 작품은 시간 및 장소와 너무도 밀접한 영향이 있다.

- 대학의 역할은 언제나 교육에 있고, 이는 훈련 시키는 것으로부터 작지만 의미있는 한 걸음을 더 내딛는 것이다.
  훈련이 직업을 위한 준비라면, 교육은 인생을 살아가도록 준비시켜 준다.

- 평론가에게 예술은 그저 하나의 명사에 불과하지만,
  예술가에게 예술이란 하나의 동사이다.

- 다른 사람들의 작품 창작을 통해 연대의식에서 나오는 용기를 얻는다.
  두려움을 함께 나눌수록 연대감은 더욱 깊어져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되는데,
  이것은 예술을 과정으로, 예술가를 영혼의 동지로 여김으로써 가능해 진다.

- 예술은 예술가들이 도전을 이겨내지 못해서가 아니라 극복할 도전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실패에 이르게 된다.

- 우리는 규칙을 누구보다 성실히 따른 예술가를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의 기억속에 남는 예술가는 <규칙>에 따라 생겨날 수밖에 없는 예술을 창조한 사람들이다.

- 아이디어를 다루는 예술이 기술을 다루는 예술보다 더 흥미로운 법이다.

- 예술과 공예의 차이는 어떤 도구를 들고 있는가가 아니라, 어떤 정신적 지침을 따르는가이다.
  공예가에게는 공예기술 그 자체가 존재 이유지만,
  예술가에게 손재주는 자신의 비젼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 과학자는 공중에 던져진 돌의 탄도를 설명할 방정식에 대해 질문하는 동안,
  예술가는 돌을 던지는 느낌이 어떤지에 대해 묻는다.

- 예술가들마다 특정한 진리를 발견하는 순간이 따로 있으며 그 순간을 놓치면 그 진리는 영원히 찾지 못한다.
  다른 그 누구도 '햄릿'을 쓸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세계의 의미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만드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증명해 준다.
  이 소설이 씌여졌을 때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달라졌으며
  셰익스피어가 할 수 있었던 그 이상으로 되돌아 갈 수는 없다.

 - 흥미로운 대답을 찾는 사람들은 흥미로운 물음을 제기하는 사람들.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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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게으른것이 아니라 두려웠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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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연속극 -고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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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순의 어머니 아버지 두 분만 사시는 고향집에 내려가니
그동안 그럭저럭 나오던 TV가 칙칙거리며 나오지 않는다.
늙은 어머니는 텔레비젼 앞에 앉아 있고
늙은 아버지는 대문간을 지키고 젊은 나는 세워놓은 안테나를
동서남북 돌려보다 신통치 않아 아예 통째로 뽑아들고
감나무 옆, 뒤란 시누대밭, 장독대 뒤곁으로 왔다갔다한다.
 내가 대문간의 늙은 아버지한테 잘 나와요? 물으면
늙은 아버지는 대문 앞에 서 있다가 할멈, 잘나와? 묻고
늙은 어머니가 아까보담 더 안 나와요, 하면 늙은 아버지가
다시 말을 받아 아까보담 더 안나온다, 하고
젊은 나한테 외친다.
 나는 또 자리를 옮겨 잘 나와요? 묻고 늙은 아버지는 늙은 어머니에게
똑같이 재우쳐 묻고 늙은 어머니는 늙은 아버지에게 대답하고
늙은 아버지는 젊은 나에게 대답한다.
 젊은 나는 반나절 팥죽땀을 쏟으며 그 기다란 안테나를 들고 뒤뚱거린다.
세 사람이 연신 묻고 묻고, 대답하고 대답한다.
늙은 아버지가 대문간을 지키고 있기가 따분한지 담배 한 개피를 피워 물며
쭈그리고 앉아 대강 나오면 그냥 보제, 하던 차 굴뚝 옆에 자리를 잡아
안테나를 돌리니 방안에서 아이구야, 겁나게 잘 나온다, 늙은 어머니 목소리가
늙은 아버지를 통하지 않더라도 내 귀까지 선명하다. 돌아가지 않게
단단히 비끄러맨다. 방안에 들어와 채널을 돌려보니 7번, 9번, 11번 다 화면이 선명하다.
 저녁 늦게 서울에 올라와 마누라, 자식새끼랑 주말연속극을 본다.
늙은 아버지도 늙은 어머니도 시골집에서 주말연속극을 본다.
참 오랜만에 늙은 아버지, 늙은 어머니, 젊은 자식놈이 안테나가 맞아 저무는 주말 저녁,
함께 연속극을 본다. 가슴 뭉클하고 선명한 주말 연속극.



                                                                             <주말연속극> - 고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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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고늙은젊음.
늙은과늙은사이에서 젊음은 태어났고
그 젊음은 늙음과늙음의 안테나를 세워
돌아가지않게 비끄러맨다.
무언가를 거쳐 누군가를 거쳐 가야만 했던
젊음의 목소리가
어딘가를 거쳐 어느때를 거쳐 가야만 했던
늙음의 목소리가
어느 순간 건네받지 않아도 통한다.
7, 9, 11 모두 선명하다.
나른한 주말 오후,
젊음을 있게 해준 늙음을 위해 안테나를 들고 뒤뚱거리며
주파수를 찾아다니는
그런 마음



선명하고 따뜻하고 평온한
주말 연속극.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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