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죽음의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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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무심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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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왕자님과 새색시  (1) 2010.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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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매직 그리고 청테이프 -이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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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어느 모임 뒤풀이 자리에서 학생들과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나온 대화의 대부분은 오직 하나, 스마트폰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평소 얼리 어답터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시대에 뒤처지지는 않는다고 자부하면서 살아왔었는데, 이런, 이젠 정말 구닥다리 세대가 되어버렸구나. 속으론 그렇게 찔끔, 했으면서도 겉으론 계속 어디선가 주워들은 `4G 스마트폰' 운운하면서 아는 체를 하려고 노력했다. 노력하면서도 한편, 그들의 놀랄 만한 정보 접근력과 속도에 감탄했고, 그것이 못내 부럽기도 했다. 이것이 우리 세대와는 다른 그들만의 활력이고, 그들만의 세대의식이자 특권이겠구나,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렇게 인정하기도 했었다.


그런 인정이 다시 뒤바뀐 건, 지난 달 서울 어느 사립대 재학생인 김예슬 학생이 대자보를 통해 밝힌 `나는 오늘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라는 공개 자퇴서를 읽게 된 이후부터였다. 내가 유심히 본 건 그녀의 자퇴서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그녀의 글씨, 그 자체였다. 그녀는 왜 많고 많은 형식 중에서도 굳이 `대자보'란 구세대의 대화창을 사용했을까?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이나, 트위터, 싸이의 다이어리도 아닌, 손도 많이 가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대자보를 이용했을까? 그것이 나는 궁금했고, 며칠 동안 계속 그 의문을 머릿속에 품고 돌아다녔다.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그 이유를 내멋대로,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었다. 만약 그녀가 자신의 `공개 자퇴서'를 학교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올렸다고 치자. 그러면 그 다음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었을까? 아마도 대자보보단 더 많은 사람이, 실시간으로 그녀의 글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 뒤에 일어날 일들은 사실 뻔하다. 그녀를 옹호하는 댓글들과 그녀를 비난하는 댓글들, 양비론의 댓글들과, 농담의 댓글들이 속속 그 아래에 달렸을 것이다. 그러다가 댓글과 댓글끼리 서로 싸우는 일도 일어났을 것이며, 홈페이지 관리자는 이 글을 삭제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을 본 김예슬 학생 또한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진행되는 논란들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입장을 수정하고 싶은 생각들이 슬몃슬몃 들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건 비단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의 문제만은 아니고, 트위터나 싸이에서도 똑같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니 어쩌면 그래서, 그녀는 `대자보'를 이용했다. 그것은 돌아갈 길을 만들지 않겠다는 의미도 있지만, 말이 아닌 어떤 행동의 의미가 더 컸다. 쉽게 수정되거나 삭제될 수 없는 행동.


지금도 인터넷에 들어가보면 수많은 이십대 청춘들이 저마다의 정치적 견해를 견지하고,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기사들과 정치적 사안들에 대해서 각자의 의견들을 보란듯이 제시하고 있다. 그 의견들만 보면 과연 누가 그들을 정치적으로 무관한, 자신의 스펙 쌓기에만 열중한 세대라고 말할 수 있을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한데, 문제는 딱 거기까지만이다. 치열하게 담론은 오고 가지만, 언제나 담론은 담론 수준에서만 머물고 만다. 누군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면, 행동으로, 정당한 투쟁으로 실천하는 것이 아닌, 단순한 비아냥거림으로, 또 다른 담론으로만 맞설 뿐이다. 그것은 권력을 가진 자들에겐 참으로 고마운 현상이 아닐 수 없는데, 그저 귀만 닫고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기만 하면, 모든 것을 다 자신들의 뜻대로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대자보를 작성한 김예슬 학생은 자신의 글 말미에 `행동한 대로 살아내겠다는 용기를 내련다'라고 썼다. 그녀는 그 문장을 유성매직으로 썼다. 그리고 그것을 청테이프에 의지해 게시판에 붙였다. 정보와 속도는 지식을 쌓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지성까지는 담보하진 못한다. 어쩌면 우리 시대의 인터넷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스스로 지성을 포기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더 많은 자유를 주는 것 같지만, 더 무서운 포기가 거기 숨어 있는 것이다


And

100퍼센트 여자아이를 만나는 일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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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어느 해맑은 아침, 하라주쿠의 뒤안길에서 나는 
100퍼센트의 여자아이와 엇갈린다.
솔직히 말해 그다지 예쁜 여자아이는 아니다. 
눈에 띄는 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멋진 옷을 입고 있는 것도 아니다. 
머리카락 뒤쪽에는 나쁜 잠버릇이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고, 
나이도 적지 않다. 벌써 서른 살에 가까울 테니까.

엄밀히 말하면 여자아이라고 할 수도 없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100미터 떨어진 곳에서부터 
그녀를 알아볼 정도다.
그녀는 내게 있어서 100퍼센트의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모습을 목격하는 순간부터 내 가슴은 땅울림처럼 떨리고,
입안은 사막처럼 바싹 말라 버린다.
어쩌면 당신에게도 좋아하는 여자아이 타입이라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령, 발목이 가느다란 여자아이가 좋다든지, 역시 눈이 큰 
여자아이라든지, 손가락이 절대적으로 예쁜 여자아이라든지,
잘은 모르겠지만 천천히 식사하는 여자아이에게 끌린다든지와 같은 식의.

나에게도 물론 그런 기호는 있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다가, 옆 테이블에 앉은 여자아이의 
코 모양에 반해 넋을 잃기도 한다.
그러나 100퍼센트의 여자아이를 유형화하는 일은 아무도 할 수가 없다.
그녀의 코가 어떻게 생겼었나 하는 따위는 전혀 떠올릴 수가 없다.
아니, 코가 있었는지 어땠는지조차 제대로 기억할 수 없다.
내가 지금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그다지 미인이 아니었다는 사실뿐이다.
왠지 조금 이상하기도 하다.

[어제 100퍼센트의 여자아이와 길에서 엇갈렸단 말이야]

하고 나는 누군가에게 말한다.

[음. 미인이었어?]

라고 그가 묻는다.

[아니야. 그렇진 않아.]

[그럼 , 좋아하는 타입이었겠군.]

[글쎄. 생각나지 않아. 눈이 어떻게 생겼는지. 가슴이 큰지 작은지,

전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겠다구.]

[이상한 일이군.]

[이상한 일이야.]

[그래서. 무슨 짓을 했나? 말을 건다든가. 뒤를 밟는다든가 말야.]

[하긴 뭘 해, 그저 엇갈렸을 뿐이야.]

그녀는 동에서 서로, 나는 서에서 동으로 걷고 있었다.
제법 기분이 좋은 4월의 아침이다. 
비록 30분이라도 좋으니 그녀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녀의 신상 이야기를 듣고도 싶고, 나의 신상 이야기를 털어놓고도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981년 4월 어느 해맑은 아침에,
우리가 하라주쿠의 뒤안길에서 엇갈리기에 이른 운명의 
경위같은 것을 밝혀 보고 싶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평화로운 시대의 낡은 기계처럼, 
따스한 비밀이 가득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난 후 어딘가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우디 알렌의 영화라도 보며, 호텔 바에 들러 칵테일이나 뭔가를 마신다.
잘만 하면, 그 뒤에 그녀와 자게 될지도 모른다.
가능성이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나와 그녀 사이의 거리는 벌써 15미터 가량으로 좁혀졌다.
자, 도대체 어떤 식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면 좋을까?

[안녕하세요. 단 30분만, 저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습니까?]

이건 너무나 바보스럽다. 마치 보험권유 같지 않은가.

[미안합니다. 이 근처에 혹시 24시간 영업 세탁소가 없는지요?]

이 역시 같은 정도로 바보스럽다. 
무엇보다도 내 손에 세탁물 주머니조차 없지 않은가.
누가 그런 대사를 신용하겠는가?
어쩌면 솔직하게 말을 꺼내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안녕하세요. 당신은 나에게 100퍼센트의 여자아이란 말입니다.]

아니, 틀렸어. 그녀는 아마도 이런 대사를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설령 믿어준다 해도, 그녀는 나와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당신에게 있어 내가 100퍼센트의 여자라 하더라도, 나에게 있어 당신은 
100퍼센트의 남자는 아닌걸요, 죄송하지만]

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만약 사태가 그렇게 되면 나는 틀림없이 혼란에 빠질 것이다.
나는 그 쇼크에서 두 번 다시 회복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내 나이 벌써 서른두 살, 결국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런 것이 아닐까.
꽃가게 앞에서. 나는 그녀와 엇갈리게 된다.

따스하고 조그마한 공기 덩어리가 피부에 와닿는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 위에는 물이 뿌려져 있고, 언저리에서는 
장미꽃 향기가 풍기고 있다.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 수도 없다. 흰 스웨터를 입은 그녀는 
아직 우표를 붙이지 않은 흰 사각 봉투를 오른손에 들고 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 것이다.
그녀의 눈이 졸린 듯한 것으로 봐서, 어쩌면 하룻밤 동안 
그것을 썼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각 봉투 속에는 그녀에 관한 비밀이 
전부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몇 걸음인가 걷고 나서 뒤돌아보았을 때, 
그녀의 모습은 이미 혼잡한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고 없었다.



물론 지금은, 그때 그녀를 향해 어떻게 말을 걸었어야 했는가를 
확실히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떻든 간에 너무나도 긴 대사이므로 틀림없이 제대로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내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실용적이지 못하다.
아무튼 그 대사는 [옛날 옛적에]로 시작되어,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지 않습니까]로 끝난다.



옛날 옛적에,
어느 곳에 소년과 소녀가 있었다.
소년은 열여덟 살이었고, 소녀는 열여섯 살이었다.
그다지 잘생긴 소년도 아니었고, 그다지 예쁜 소녀도 아니었다.
어디에나 있는 외롭고 평범한 소년과 소녀였다.
하지만 그들은 틀림없이 이 세상 어딘가에 100퍼센트 자신과 똑같은 
소녀와 소년이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렇게, 그들은 `기적`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적은 확실히 일어났다.
어느 날 두 사람은 거리 모퉁이에서 탁 마주치게 된다.

[놀라워, 난 줄곧 너를 찾아다녔단 말야. 네가 믿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넌 내게 있어서 100퍼센트의 여자아이란 말이야]

하고 소년이 소녀에게 말한다.

[너야말로 내게 있어서 100퍼센트의 남자아이야.
모든 것이 모두 내가 상상했던 그대로야. 꼭 꿈만 같아.]

두 사람은 공원 벤치에 앉아서, 서로의 손을 잡고 언제까지나 
실컷 얘기를 나눈다. 두 사람은 이미 고독하지 않다. 
그들은 각기 100퍼센트의 상대자를 원하며, 자신은 그 상대자의 
100퍼센트가 되고 있다. 100퍼센트의 상대자를 원하며, 상대자의 
100퍼센트가 된다는 것은 그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것은 이미 우주적인 기적인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마음속을 얼마 안되는, 극히 얼마 안되는 
의구심이 파고든다.
이처럼 간단하게 꿈이 실현되어 버려도 괜찮은 것일까 하는.
대화가 문득 끊어졌을 때, 소년이 말한다.

[이봐, 다시 한 번만 시도해 보자. 가령 우리 두 사람이 
진정한 100퍼센트의 연인이라고 하면, 반드시 언제 어디선가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리고 이 다음에 다시 만났을 때도 역시 
서로가 서로의 100퍼센트라면, 그때 바로 결혼하자구. 알겠니?]

[응, 알았어.]

그리고 두 사람은 헤어졌다. 서쪽과 동쪽으로.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시도해 볼 필요는 조금도 없었다.
그런 것은 해서는 안될 일이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정 100퍼센트 완벽한 연인이었으니까.
그것은 기적적인 사건이었으니까.
하지만 두 사람은 너무나 어려서, 그런 것은 이해할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정석처럼 비정한 운명의 파도가 두 사람을 마구 농락하기에 이른다.
어느 해 겨울, 두 사람은 그해에 유행한 악성 인플루엔자에 걸려,
몇 주일간이나 사경을 헤맨 끝에, 옛날 기억들을 몽땅 잃고 말았던 것이다.
어찌된 일일까, 그들이 깨어났을 때 그들의 머리 속은 마치 
D. H.로렌스의 소년시절 저금통처럼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참을성 있는 소년과 소녀였기 때문에,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다시금 새로운 지식과 감정을 터득하여, 훌륭히 사회에 
복귀할 수 있었다.

아아 하느님,
그들은 진정 확고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정확하게 지하철을 갈아타거나 우체국에서 속달을 부치거나 
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리고 완벽하지는 못해도 75퍼센트의 
연애랑, 85퍼센트의 연애를 경험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소년은 서른 두 살이 되었고, 소녀는 서른 살이 되었다.
시간은 놀라운 속도로 지나갔다.
그리고 4월의 어느 해맑은 아침, 소년은 모닝 커피를 마시기 위해 
하라주쿠의 뒤안길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하고, 소녀는 
속달용 우표를 사기 위해 똑같은 길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한다.

두 사람은 길 한복판에서 엇갈린다.
잃어버린 기억의 희미한 빛이 두 사람의 마음을 한순간 비춘다.
그들의 가슴은 떨린다.
그리고 그들은 안다.

그녀는 내게 있어서 100퍼센트의 여자아이란 말이다.

그는 내게 있어서 100퍼센트의 남자아이야.

그러나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기억의 빛은 너무 연약하고,
그들의 언어는 이제 14년전 만큼 맑지 않다.
두 사람은 그냥 말없이 엇갈려, 혼잡한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고 만다.
영원히...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지 않습니까.



그렇다. 나는 그녀에게 그런 식으로 말을 꺼내 보았어야 했던 것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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